로페즈, 그가 만약 일본으로 간다면.

대망의 한국시리즈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기아의 우승으로 끝났다. '엘롯기' 동맹으로 불릴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침체에 빠져 있던 기아였기에 이번 우승은 정말 그 의미가 남다르지 싶다. 또한 비록 한화팬이긴 하지만, 포스트시즌이 시작하기 전 기아의 우승을 정말 간절하게 염원했던 한 사람으로서 어제의 7차전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말이 있듯, 이번 한국시리즈에서도 양 팀의 투수력이 시리즈의 향방을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마다 투수들이 어떤 역량을 보이는가에 따라 승패가 극명하게 엇갈렸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5차전이었다. '아퀼리노 로페즈'의 완벽한 투구는 그 날 승부의 향방에 대한 온갖 추측과 예상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는데, 그 투구 내용은 기아의 완벽한 승리를 예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차전의 승리로 로페즈는 한국시리즈에서만 2승을 달성했고, 방어율도 1.5점 대로 떨어뜨렸다. 다만 단기전의 특성상 로페즈가 MVP가 된다는 것은 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기전에는 타자들이 활약을 보일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은 반면, 투수에게는 기회가 제한되는 데다가 최근 투수 분업화가 완벽하게 정착되어 예전처럼 2승에 세이브를 추가해서 올리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기억이 맞다면, 1999년 한화가 우승했을 때, 송진우 선수는 2승 1세이브로 MVP에 오름. 2003년에 정민태는 3승을 거둔 적도 있다고는 합니다.;;;)

7차전과 5차전이 약간 간격을 두고 진행된다면(정상적인 경우 이틀의 휴식이 있음) 모르겠으나, 한국시장의 기형적인 구조로 5차전과 7차전은 하루 사이의 간격으로 열렸다. 완투를 한 로페즈가 7차전에 다시 나온다는 건 쉽지 않아 보였고, 또한 5차전이 끝났을 때는 7차전까지 갈 거란 예상도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의외의 광경이 나타났다. 7차전 8회 초에 로페즈가 투수로 올라온 것이었다. 5:5 동점이던 상황. 만약 로페즈가 내려오기 전에 기아에서 점수를 낸다면 로페즈는 1990년대 이후 보기 힘들었던 '한국시리즈 3승 투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MVP는 거의 확실한 것이었고, 혹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8회 초 상황을 아무 실점 없이 막고 내려온 것만으로도 로페즈는 MVP 자격이 충분해보였다. 그때까지 기아가 우승하는 데에 있어서, (한국시리즈에서) 로페즈만큼 많은 기여를 한 선수는 전혀 없어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경기는 9회 말, 1아웃 상황에서 정말 드라마같았던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끝이 났다. 역대 한국시리즈 사상 3번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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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완이 홈런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시리즈 MVP 투표가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은 했다. 당연히 로페즈가 MVP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용병'인데다, 이런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 만큼 나지완이 MVP가 되더라도 많은 논란이 발생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7차전에서 로페즈가 다시 등판하지 않았다면 모르되, 로페즈가 등판한 상황에서 만약 나지완이 MVP가 된다면 이걸 로페즈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 정말 걱정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비슷한 면이 있는 데다가, 같은 동양시장이고 다른 환경에서 한 번 적응한 선수는 또 다시 다른 환경에서 적응하는 것도 비교적 수월하기에 일본에서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외국인 선수'를 한국에서 빼내어 갔다. 그 유명한 흑곰 '우즈'에서부터, 리오스, 레스, 그레이싱어 등등 그 사례는 무척 많고, 그들 가운데 레스나 브룸바 등은 일본 시장에서 실패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예도 있다. 아마 올해도 시즌이 끝나고, 시장이 열리면 수많은 국내 스타들 뿐 아니라, 외국인 선수들이 일본 시장의 문을 두드릴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대개 사람들은 그런 광경을 (비판하진 않더라도) 좋게 보지 않는다. 연봉과 환경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대놓고 비난할 수는 없지만, '기껏 여기에서 키워놨더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반응 정도다. 아마 너희가 여기에서 성공할 수 있게 우리가 여건을 조성해주었는데, 너희는 은혜도 모르고 바로 이곳을 등지느냐는 생각 정도일 듯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란 과연 온당한 것일까.

이번 시즌 중에 두산의 랜들은 퇴출되었다. 랜들은 사고로 인해 부상을 입었는데, 부상에서 완쾌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용병'이란 당장의 전력감인 탓에 두산에서는 다른 선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랜들은 그런 두산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외국인 선수'라는 말 대신에 '용병'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사실 이건 말 그대로 '돈 주고 대신 싸우게 하는 선수'라는 뜻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 기량이 미달하거나, 몸에 이상이 발생하면 바로 내쫓고 만다. 구단에서 외국인 선수를 쓰는 이유는 사실 자신들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일 뿐이지, 그 선수들의 복지 여건이나 기회 부여 차원에서 외국인 선수를 쓰는 일은 결코 없다. 아마 그들 또한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다.

그런 그들의 입장에서 좋은 기회가 주어졌는데, 굳이 '정'과 '의리'를 생각하며 이곳에 남을 이유는 없다. 개인간의 정과 의리는 있을지 모르나, 팀은 언제든 그들을 내쫓을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구단 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있는 기자라든지, 일반인들 또한 그렇다.

나지완의 활약이 기대에 못 미쳤다든가, 별 것도 아니었다는 게 아니다. 분명 그도 MVP에 걸맞는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과연 로페즈의 역할을 윤석민이라던가, 양현종, 이대진, 서재응, 곽정철 등의 한국인 투수들이 보였다고 하더라도 같은 결과였을까? 또 늘 회자되는 이야기가 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이 MVP가 되지 못한 것이 불공정했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대신 최동원이 정규시즌 MVP가 될 것이라는 보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면, 로페즈에게는 어떤 보상이 있는가. 로페즈는 외국인 선수여서 신인왕이 될 수도 없고, 정규시즌 MVP 후보라고 하더라도 도리어 정규시즌에서는 김상현이 보여준 활약에 밀린다. 김상현은 MVP에 선정된다 하더라도 어떤 이견도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로페즈는 얼마나 실망하였을까. 동점이 된 순간, 로페즈는 아마도 스스로 등판을 자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에는 MVP에 대한 욕심도 없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나 또한 로페즈가 올라오는 순간 '이것으로 MVP는 로페즈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시즌은 끝났고 스토브리그가 시작할 것이다. 올 시즌 남다른 활약을 보인 만큼 로페즈에 대한 일본 구단들의 구애 또한 끊임없을 것이다. 만약 로페즈가 일본으로 간다면? 난 명백하다고 본다. 그건 한국시리즈 MVP에서 탈락한 것에 대한 서운함과 거기에서 느낀 한국 야구의 현실에 대한 냉혹함 때문이 아닐까 하는. 그는 영원한 이방인이기에 일본 시장을 택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예전에 우즈는 첫 시즌에서 보인 활약으로 일본에서 보낸 끝없는 제의를 물리치면서 '한국에서 느낀 정'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 남는다고 한 적이 있었다. '정'으로 영원히 선수들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일본에 비해 가질 수 있는 강점이라면 어쩌면 그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린 '프로'라는 이름과 '우리 민족, 우리나라 사람' 이런 편견 아래에 그 강점마저 내팽개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또 어떤 강점이 있단 말인가.

by honest | 2009/10/25 20:25 | 드라마 | 트랙백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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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반칙왕 at 2009/10/25 21:11
맞습니다. 한국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로페즈선수가 이번일로 상심이 클 것이 당연하죠. 일본에 간다면 이 일이 상당히 영향을 미쳤을거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네요. 물론 일본은 외국인 선수에게 더 냉혹하지만 실력에 걸맞는 연봉이라도 주니까요.
Commented by 유남권 at 2009/10/25 21:25
기사 떴더군요.
마음이 상한 로페즈는 시상식 이후 그라운드에서 펼쳐진 즉석 축하쇼에 참여하지 않고, 덕아웃에 통역과 함께 홀로 앉아 있었는데요. 로페즈는 "한국에서의 이같은 정서를 이해 못하겠다"고 통역에게 하소연을 했다고 합니다.
Commented by honest at 2009/10/25 23:56
기사도 있었군요~

아 정말 선수가 그렇게 이야기했을 정도면 완전. ㅠ
Commented by honest at 2009/10/25 23:55
반칙왕/사실 우리도 연봉은 실력에 걸맞게 준다고 생각하는데, 워낙 물가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죠.
여기서 받는 연봉과 일본에서 받는 연봉은 정말... ㅎㄷㄷ
제발 일본에 가지 않고, 내년에도 한국에 남아 올해에 받지 못한 MVP를 꼭 받았음 하는 바람입니다~
(뭐지.;;; 난 한화팬인데.;;; 한화 입장에선 로페즈가 없어야. ㅠ)
Commented by 동네사람C at 2009/10/26 00:50
리오스가 사랑받았던 이유중에 하나가 한국 야구판을 너무 정확하게 이해했고, 그래서 의리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했던 부분이죠. 뭐 나중에 약물때문에 그런 모습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사실 로페즈는 미국 남부 귀족같은 구톰슨이나 리오스처럼 유들유들한 면도 없고 인터뷰도 안하고 좀 뚱한 이미지라 '얘 내년에 일본 가겠다.'라고 생각했는데 5차전에서 화이팅 외치고 세레모니도 하고 선수들이랑 잘 지내는거 보고 '아직 일본에서 오퍼 없나보네. 그럼 잡을수 있겠다.'라고 굳게 믿고 있었답니다. 본인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인터뷰도 나왔구요.

아.. 근데 MVP.. 기아팬 입장에서는 뒷돈으로라도 좀 잡았으면 하네요.ㅠㅠ
Commented by honest at 2009/10/26 11:30
뒷돈은 없었으면 합니다만, 경기장 밖에서의 이미지는 잘 모르지만 경기장에서의 모습은 괜찮아보이더라고요.
예전에 문학에서 SK:기아 경기 본 적 있었는데, 그때 투수도 로페즈였습니다. 경기장 안에서의 화이팅이 괜찮더라고요~
어떻게든 설득해서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에서 40만 불 받던 선수라 여기서도 그렇게 많이 받진 않았을 듯한데, 상한선까지는 올려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Commented by 시지야 at 2009/10/26 01:28
한화 입장에선 로페즈가 없어야,ㅠ(2)..

사실 상대팀의 강한 선수가 한국을 떠난다면야 타팀팬 입장으로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퍽)
그 이유가 한국에 대한 실망이라고 한다면 한국인으로서 좀 그렇네요.

사실 냉정히 생각해보면 로페즈가 받을 공산이 컸는데 7차전에서 나주완의 임팩트가 너무나도 컸죠;;
그래도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낸 선택이라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당사자라면 충분히 오해살만한 일이었어요..
Commented by honest at 2009/10/26 11:31
뭔가 기자들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로페즈가 평소 뚱하고 무뚝뚝한 이미지로 인터뷰에도 잘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감정(?)이 있어서 나지완이 선택된 것 같아 마음이 더 그렇습니다.
Commented by 기아타이거즈 at 2009/10/26 04:19
타이거즈 팬으로서 이번에 승리가 즐겁긴 하지만,
사실 로페즈 구톰슨 이 용병둘 없었으면 올해도 가을잔치는 못갔을듯 한데 참 너무들하네요.
그럴리야 없겠지만, 로페즈 구톰슨 일본가고
작년 꼴아시절로 한해만 돌아가보면 좋겠네요 진짜
Commented by 몽몽이 at 2009/10/26 10:14
열받은 로페즈를 돈으로 달랠 수 있을까영? 돈 하면 일본한테 안될텐데...
Commented by honest at 2009/10/26 11:32
제 생각에도... 우리나라 고액 연봉도 일본에선 평범한 수준인데...
Commented by Teddy at 2009/10/26 10:38
저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로페즈는 더 했겠지요.
나지완 선수의 홈런도 충분히 감동적이고 극적이였지만...
그건 그거고 확실히 기아 우승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선수는 로페즈라고 생각되는데..
참 저도 한화 팬인데 반갑네요. ㅎㅎ
Commented by honest at 2009/10/26 11:33
ㅎ 내년에 한화가 좀 좋은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한대화 감독님께서 얼마나 멋진 모습을 보이실 수 있을지...
개인적으로 전 김인식 감독님이 1년 쯤 더 하셨으면 좋을 거라 생각하는데...(1천 승 달성 너무 아쉽습니다. ㅠ)
Commented by honest at 2009/10/26 11:32
기아타이거즈/아, 전 타이거즈 팬은 아니지만 막상 그렇게 된다면 기아 팬들은 너무 아쉬워질 듯한데요.;;;
Commented by BeN_M at 2009/10/26 18:34
아, 로페즈...쩝...

저도 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과
'1순위 로페즈, 2순위 최희섭과 나지완, 3순위 종범신 일꺼 같은데?'
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지완 선수 MVP 획득..
뭐, 나지완 선수도 충분히 잘해줬지만
로페즈의 위용을 생각하면 아쉽군요, 쩝.

스토브 때 잡을 수 있으려나..
Commented by honest at 2009/10/26 19:18
전 왠지 로페즈의 표정이 너무 맘에 들더라고요~
Commented by 아날로그 at 2009/10/27 23:02
저도 매일같이 새벽잠을 설치며 중계를 보았답니다. 해설자가 말했듯이 로페즈가 먼저 이강철 코치에게 최종7차전 자신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던지겠다고 의사를 보였다네요. 사실상 3승이나 다름없는데. 당연히 MVP욕심이 있었겠죠? 기아팬들도 MVP발표할때 로페즈 외치고 그랬다던데...

인터넷에 기사 나온거 보면 로페즈가 일본진출 안한다고 한국에 남겠다고 했다던데, 그게 5차전 끝나고 나온 말입니다. 이제 일본 가버려도 이해가 됩니다. 로페즈가 앞으로 꼭 받아야 할 것은 골든글러브 투수부문이 아닐까 싶네요. 그걸로 쓰린 가슴이 좀 나아지려나...

Commented by honest at 2009/10/28 21:27
근데 내 생각에 골든글러브는 더 힘들어... 다승은 공동 1위인데다, 방어율 1위도 아니잖아. 한국시리즈에서 던진 게 좀 감안되면 받을 수도 있긴 할텐데, 이번 결과에서 보듯 기자들은 로페즈에 대해 좀 부정적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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